홍준철    합창단 음악이있는마을 20주년사를 탈고하며 201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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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 팔자가 있는 게 아니었다. 합창단에도 분명 팔자가 있었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길흉화복의 질곡이 언제나 있었다. 강력한 음악적 이상과 실천력이 있고 정신적, 음악적 리더의 존재감, 튼튼한 임원진, 합창에 미쳤다고 신앙고백을 한 단원들, 늘 채워지는 예산이 있는데도 그랬다. 크던 작던 문제는 언제나 있었고 안심하는 순간 위기가 왔고, 고통과 번민 끝에 기회가 찾아오곤 했다.

좀......, 아니, 많이 무식했다. 이것저것 재지 않았다. 순수라고 믿는 목표를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한국창작합창곡’이라는 눈물겨운 순수를 가슴에 품었기에 무식할 수 있었고 용감할 수 있었다. 창작곡연주가 이 나라의 음악 미래를 열 것이고, 우리 자식들에게 물려줄 유산을 만든다는 절박한 믿음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20년 동안 아프게 이 땅과 이 시대를 노래했다. IMF를 당한 이 땅의 서민들을 위해 질기게 살아남자고 <나무>를, 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꺼내고 자신은 끝내 나오지 못한 신오쿠보역의 의인 고 이수현을 위한 <친구를 위하여>, 세월호 주검을 통곡으로 노래했던 <세월호 추모칸타타>, 나병환자를 평생 헌신으로 돌본 고 이경재신부를 위한 <라자로의 노래>, 이시대의 청소년을 위한 <Salem Mass>, 전 세계 52개국 절망의 땅을 섬긴 원불교 박청수교무의 칸타타 <칸타타 청수>.......,

그렇지만 우리는 투사가 아니다. 그저 음악적 재능이 조금 있는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20년 동안 합창단 단원이었던 이름을 적으며 그 얼굴을 떠올리고 함께 얽힌 사연을 추억해보면 지휘자부터 단원까지 그저 그만그만한 사람들이었다. 엄청난 위업을 이룬 음악가도 없고, 사업으로 대성공한 사람도 없으며, 학자나 고위 공무원, 정치가가 된 사람도 물론 없다. 나는 그 보통스러움에 진실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합창단 음악이있는마을의 20년 이후? 낙관할 수 없다. 다만 비관적이지도 않다. 그저 노력할 따름이다. 우리의 노래가 부르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가녀린 파동으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 켜켜이 쌓이는 합창의 단층에 우리의 행복도 새겨질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행복해 지자고 노래했고 앞으로도 행복해지자고 노래 할 것이다. 다만 1996.10.18 그 뜨거운 순수의 호롱불이 가려지지 않도록 열심히 그을음을 닦아내긴 해야 한다. 처음처럼 소주를 맥주에 타서 득음주라고 속여 마시면서 말이다.    


  김미옥 선생님..감동입니다..
참으로 귀한 일을 해내신 선생님과 편찬팀에
감사의 마음을 거듭 거듭 전합니다
    2016/08/16
  이혜연 그 20년중에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저는 음마의 발전에 얼마나 보탬이 되었는지 생각해봅니다. 저의 20, 30대를 채웠던 음마가 저에겐 큰 역사입니다.     2016/08/16
  이완재 제가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술한잔 대접하겠습니다.     2016/08/17
   퇴촌 이유서 [2]  홍준철
   2009년 12월 22일 만해마을에 다녀와서  홍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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