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철    퇴촌 이유서 2018/01/03
퇴촌 이유서

저 홍준철은 2018. 12. 31일 부로 모든 직책에서 벋어나 바다가 보이는 남도 어디쯤으로 퇴촌(退村)하여 종반기 삶을 살아보려 합니다. 1년 전부터 소문을 내며 전파되기를 바랐습니다만 입이 무거운 분들이 많아서인지 도무지 무성한 소문으로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미 차근차근 준비를 많이 한 상태라서 되돌리기도 어려운 상황까지 왔습니다. 하여 앞으로 있을 ‘ 왜 그만두느냐?’, 아직은 더 해도 되지 않느냐?’, ‘60이면 한창인데’, ‘뭔가 있는 것 아니냐?’ 등등 관련 질문을 너무 많이 받을 것 같아 이 퇴촌 이유서로 답을 대신하려합니다.  

1. 할 만큼은 했습니다.
  
25살부터 성가대 지휘를 시작해서 꼬박 35년을 했습니다. 성공회에서 33년을, 음악마을에서 21년을, 파주 북소리합창단에서 7년을 지휘했습니다. 교육을 위해서도 성공회대학교 대학원에서 15년을 겸임과 대우교수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15년을 강사로 가르쳤습니다. 한국합창의 발전을 위해서도 일 하였습니다. 합창단 음악이있는마을과 파주 북소리합창단을 통해서 말입니다. 한국합창계가 유럽과 미국음악을 바라보는 동안 저는 한국음악을 바라보았습니다. 서양음악을 소비하는 통념에서 우리 음악을 생산하는 이 <길 없는 길>을 만들어 갔습니다. 언젠가 한국음악계가 제정신 차리고 나면 이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에 미리 길을 낼 수 있을 때까지 내보았습니다. 후배들을 위해서 <합창지휘자를 위하여>, <합창단원을 위하여>를 출판하였고 제법 읽혀지는 저서가 되었습니다. 물론 건방지게 ‘다 이루었다’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제 스스로 위안한다면 <할 만큼은 했다>라는 뜻입니다.  

2. 체력의 방전

저는 못 말릴 정도로 혈기 왕성하게 활동하는 형입니다. 지휘나 강의도 소대장급으로 합니다. 단원과 함께 뛰고 학생들도 덩달아 치열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 같고 직성이 풀립니다. 노련하게 연대장이나 사단장급으로 하면서 체력안배를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저는 그런 활동이 왠지 비겁하게만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음악은 현장을 함께 뛰며 음악의 굽이굽이를 달려야 제대로 된 음악을 만들 수 있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또한 좋아하는 술과 담배도 40년 동안 주구장창 즐겨왔습니다. 저는 술을 모르면 음악을 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음악은 이 현실을 떠나는 무엇입니다. 즉 Ex-stasis(황홀경으로 번역됨)입니다. 술은 이 경험을 충실하게 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건 정말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신이 고생하는 인간을 위해서 미안해서 주신 작은 선물일 것이라고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담배는 끊었어야 옳지만 완벽하게 저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제 삶이 이러했으니 특별히 아픈 곳은 없으나 소대장하기에는 이미 20~30대 체력이 아닙니다.

그러니 모든 일을 예전처럼 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면 제가 했던 모든 일들을 위해서 그만 물러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더 욕심 부리는 것은 과욕의 서막일 뿐입니다.  

2003년도에 일본 오쿠보 혼성합창단과 서울과 동경에서 합동연주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47세였고 츠지 마사유키 선생님은 위암수술 후유증으로 투병중인 70대였습니다. 이때 츠지 선생님은 휠체어에 의지한 채 살인적인 투혼을 발휘하시며 동경과 서울 공연을 마치셨고 1개월 뒤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저는 그분 때문에 국제문상을 하였고 많은 것을 영향 받았습니다. 죽기직전까지 음악을 한 그 정신에는 정말 경의를 표하며 존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저는 그렇게 살지는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단원들이 지휘자에게 쏟은 정성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원들이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지휘자를 불안하게 그리고 슬프게 바라보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2016년부터 저는 심각한 체력의 고갈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안 그런 척 했으니 잘 모르실 터이지만 연습할 때마다 무대에 설 때마다 저는 힘들어 했습니다. 2017년도는 더욱 심해서 고통스러울 정도였고 쓰러지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입니다. 이후의 연주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를 잘 압니다. 앞으로도 술을 마실 것이고 담배도 피울 것입니다. 그러니 저의 체력은 하향곡선을 탈 것이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휘자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게 불 보듯 뻔합니다. 너무 늦기 전에 지휘자 바턴을 넘기는 것이 저를 위해서, 또 합창단을 위해서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3. 꼰대가 되는 게 싫다.

잘 늙어가는 것은 잘 살기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이강숙 선생님이나 이건용 선생님을 뵈면 성인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맑은 정신을 유지하시고 평정심과 정의로움, 지혜가 가득하십니다. 그리고 후세대를 위한 일들을 하시는 것을 보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그 분들을 본받고 싶지만 불행하게도 저는 그 정도의 재목이 못 된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저는 이렇게 변 할 겁니다. 나이가 먹을수록 판단력은 흐려지고,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게 불편하게 느껴질 겁니다. 선과 악의 구분도 모호해 질 것이고, 오로지 나만 편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불편을 무시해 버릴 터이고, 자기주장만 더 세져 불화를 조장하고, 편애할 확률이 높고, 갖지도 않은 권력을 이용해 잇속을 챙기고 다른 사람들을 누를 것입니다. 더구나 젊은 세대들을 이해 못하고 구닥다리 옛 방식을 고집하여 세대 간의 불통을 낳을 것입니다. 이런 점이 바로 제가 가장 싫어하는 꼰대의 모습입니다. (이점은 제가 김성근 감독을 아직도 좋아하는 것만으로 부족함 없이 증명되었습니다)

태극기를 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슬프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시대는 그들이 누릴 시대가 아님에도 자신들이 주인공이 되려합니다. 그들은 꼰대를 넘어 다른 사람을 헤칠 위험이 있는 이성이 말살 된 좀비에 가깝게 보여 질 정도입니다. 결단코 저는 그렇게 되어 여러분 앞에 서고 싶지 않습니다.            

4. 이젠 서울을 떠나고 싶습니다.  

5살 때 부모를 따라 서울에서 55년을 살았습니다. 선택된 백성처럼 서울 시민임을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인간이 사는 곳이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잘 압니다만 서울은 풍부한 먹잇감이 제공됨으로서 비정상적으로 인간들이 몰려있고 서로의 몸을 부디 치며 사는 곳입니다. 겉보기는 화려하지만 정글입니다. 약육강식의 원리가 철저히 지배하는 곳입니다. 저는 이점을 30대부터 느껴왔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야 겨우 먹을 것을 주는 비정한 곳임을 알았습니다. 교회와 학교에서 대부분의 먹이생활을 했음에 다른 곳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삶은 불안정 했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곳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새끼를 낳은 둥지가 서울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합창단이 있는 곳이 서울이었기에 인내 반, 적응 반으로 30년을 더 살았습니다. 이제는 회색빛 도시 서울의 논리에서 벋어나고 싶습니다.  

5. 이젠 나를 찾고 싶다.

이제는 나를 위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겨우 먹고 살만큼의 환경만을 만들려합니다. 그리곤 한없이 큰 외로움에 도전하고 생각하고 읽음을 반복함으로서 더 잘 쓰고 싶었던 음악에 관한 글쓰기를 천천히 이어가려 합니다.    

합창음악은 오랜 연습이 필요하고 순간의 연주로 끝나버리는 예술인지라 집중적인 힘이 필요한 장르입니다. 저는 앞서 열거한바 대로 이 힘을 잃어가고 있는 터이지만 오래 생각하고 조금씩 써 내려가도 되는 글쓰기가 지금의 저에게는 적당하다고 여겨집니다. 바다가 보이는 조용한 곳에서 시작하려 합니다. 불교에서는 나이 들수록 산으로 올라간다고 하지요.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의미로요. 저는 반대로 바다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생명이 태어난 그곳으로요. 시들어가는 근력이지만 아직 뭔가 힘이 남아있을 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합니다.

후회 할 겁니다. 60년을 살아오는 동안 제가 하고 있었던 모든 일들을 그만두는 순간순간마다 후회했었습니다. 이별 할 때마다 아팠고 일을 놓는 순간마다 아쉬워서 후회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외로움 잘 타는 제가 어떻게 버틸지 모를 지경입니다. 하지만 후회는 해도 다시 돌아오지는 않겠습니다. 세월은 흐르겠지요.  또 하나씩 잊혀 질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새로운 세상으로 나를 보냅니다.

6.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은 이해를 요청 드리며 감사를 올립니다.
   한해 남은 도시생활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2018.1.3. 바람 부는 만해마을에서 홍준철 올림


  배영학 분명 많은 고민을 하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제 다시 돌아오려고 하는 저에게는 무척 아쉽고 섭섭한 소식이지만, 선생님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혹시 갈 곳은 정하셨습니까?     2018/01/08
  이완재 올 한 해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2018/01/09
   우리의 음악 텃밭은 건강한가? [3]  홍준철
   합창단 음악이있는마을 20주년사를 탈고하며 [3]  홍준철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Ye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