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연    [합창교향곡]의 유감 그리고 [새로운 소리]의 갈망 2000/10/11
꽤 오래 전부터 연말과 새해를 상징하는 음악으로 베토벤 9번 [합창교향곡]을 연주한다. 베르린도, 비엔나도, 뉴욕도, 도쿄도, 서울도 저마다 9번을 연주하기에 분주하다. 그것도 몇 십년 째 지겹지도 않는지 열심히 연주한다. 종치면 침을 흘린다는 반사작용처럼 새해만 되면 오토메틱 자동 시스템으로 연주들을 한다. 이제는 9번이 연주되면 시간이 놀라서 1년이 지나버릴 정도가 되었다.

베토벤은 9번 교향곡을 전 생애를 통해서 작곡했다고 한다. 베토벤의 고민은 <인류의 구원은 누가 할 것인가?>였다. 우선 신을 꼽았다. 그러나 신(절대자)도 인류를 구원하지 못했다. 중세가 그것을 증명해 준다. 그렇다면 인간인가? 역시 베토벤은 그렇지 못했다고 보았다. 나폴레옹을 믿었지만 그도 결국 권력의 속성에 물든 인간이였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인류의 희망을 담지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베토벤은 그것을 갈망했다. 그러나 찾지는 못했다. 그래서 갈망하는 이상의 세상을 쉴러의 시를 인용 9번 교향곡에 담아 작곡하게 된 것이다.

베토벤의 작품들이 훌륭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9번을 초연한게 1824년 이였으니 꼭 176년이 지났다. 그것도 아폴론적(신)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간)인 것으로 이등분하고, 이를 근본 구조로 하는 서양 사고방식의 역사적 산물로 잉태한 9번이 해와 달과 불과 물, 나무와 쇠와 흙이 유기적인 결합으로 만물을 만들어 내고 운영한다는 세계관이 있는 한국 땅에서 어쩌면 그리도 잘 어울리는 것처럼 연주해 댈 수 있는 것일까? 비록 베토벤이라는 사람이 작곡했으나 우리도 갈망했던 바로 그 음악이라 그런 걸까? 아니다. 우리의 음악관이 양악도입 후 100년이 넘긴 했지만 그래서 음악 하면 서양음악을 떠올리기는 했지만 베토벤 9번이 우리의 노래가 될 수는 없다. 다만 우리 노래처럼 행세를 하고 있을 뿐이요, 이 땅의 음악가들과 관객들은 적당히 속이고 알면서도 속아주기 때문이다.

분단된 땅덩어리, 동족과의 전쟁, 군부의 억압, 거짓과 부패 가난으로 점철되고 무조건 적인 경제성장, 버려진 인권, 망가진 자연, 거의 모든 것이 뒤틀려버린 한반도 땅의 100년을 뒤돌아보면 사실 베토벤 9번은 어울리지 않는다. `둥굴게 뭉쳐라, 황금의 술에 맹세를 걸어라, 충실은 그대의 영원한 약동'이라는 4악장 합창의 피날레 가사가 우리내 역사의 아픔과 질곡들을 치유하고 새 소망을 담기에는 너무도 동떨어진 내용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식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살아온 지난 일들을 뼈 속 깊이 반성하고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그 어김없는 주제로 곳곳의 막히고 터져 버린 기(氣)들을 순리대로 흐르게 하고 <꿈에도 소원>이라는 통일의 염원을 담아낼 된장 냄새 팍팍 풍기고 살 냄새 펄펄 나는 그런 음악을 만들어 불러야 한다. 그 노래를 듣고 울고 그 노래를 부르며 기뻐하고 그 노래로 춤을 추고 그 노래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한해를 보내는 보람과 우리가 맞이할 새로운 희망들을 온전히 담아 새해가 밝을 것 아니겠는가.

그때 가서야 진정으로 우리와 베토벤 합창교향곡 9번이 어울리지 않았다고 알 것이다. 또한 그때 가서야 베토벤식 환희의 송가도 제대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는 훌륭한 새해맞이 한국음악이 작곡되고 연주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언젠가는 연말에 베토벤 9번을 연주한다는 소식을 못들을 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게 2001년 겨울이었으면 좋겠다.

홍준철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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