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철    미아리 골목길 2013/11/27
                             (단편) 미아리 골목길
                              

                                                            
그 남자는 자꾸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쓴 침이 입안에 고이며 '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라는 말만 뇌까렸다. 마흔 중반이 넘어 서면서부터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 문제가 더 그 남자를 괴롭혔다. 사실 그 남자는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주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렴풋이 알고 어렴풋이 잊은 상태에서 커다란 회색 빛 도시에서 정신없이 살다가 문득 허탈하게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 날도 비가 내렸다. 그 남자가 시내에서 일을 보고 난 시간이 오후 4시..... 돌아 가봐야 퇴근 시간이 될 테고 집에 가자니 이른 시간이고 비는 내리고 ..... 어디론가 가고 싶기도 하고 누구를 만나고 싶기도 한데 아무것도 마땅히 연락 할 사람도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일상에서 갑자기 퉁겨져 버려진 듯한 느낌……. 들고 있던 무거운 가방을 잃어버린 채 또 잃어버렸다는 사실도 잃어버린 채 손의 가벼움이 이질적이기만 하고 옆구리만 허전한 기분……. 그 기분이 또 들었다. 여지없이 또 ‘ 이게 아닌데……., 내가 지금 속고 있어.......’를 중얼거렸다.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빼서 차에 타고 창문을 비가 들이치지 않을 만큼만 열고 담배를 피면서 커피를 홀짝거렸다. 어떻게 하지? 어딜 가지? 집에 일찍 가는 것도 익숙하지 않고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데 그럴 사람도 없고, 서점에 가서 책을 볼까 했지만 그도 마땅치 않았다. 습관적으로 뭔가를 해야만 하고 뭔가를 들고 있어야만 하는 그 남자는 그렇게 빈 시간을 못 견뎌하고 있었다.  빗줄기가 자동차 지붕을 후드득 두드리고 지나간다. 흠칫 놀라 고개를 들자 차 안 백미러에 한 얼굴이 비쳤다. 거기에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의 눈매가 있었다. 잔주름이 눈가에 가득하고 뭔가에 찌들은 눈동자가 보였다. 윤기 없어 가늘어진 머리카락이 이마를 타고 내려온 것도 보였다. 뒤돌아 볼 겨를 없이 달려온 마흔 여섯의 남자의 눈매……. 갑자기 그 남자가 흉하게 보였다. 지금 저 얼굴은 무엇인가? 탁하고 풀어져 있지 않은가? 뭔가 부정한 것을 탐내다 얻지도 못해 지친 눈매가 아닌가? 억울하다고 말하고 있고 속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  바라보기도 싫은 눈이었다.

다시 커피를 조금 마시고 담배를 갈아 물었다. 연기들이 잘 빠져나가지 못해 차안이 온통 뿌옇게 되었다. 시동을 켜고 환풍 장치를 가동하다가 불현듯, 정말 불현듯 그 남자는 가고 싶은 곳이 하나 생각났다. 근 26년을 잊고 살았던 곳, 미아리...... 그래! 미아리에 가보자 ..... 5살 때 서울로 이사와 가난이 넌덜머리가 나도록 뼈에 박혔던 미아리 산동네......  군대가기 전까지 6-7번을 족히 이사를 했음에도 반경 1Km를 벗어나 보지 못하고 뱅뱅 돌았던, 어린 시절이 퇴적층처럼 쌓여 있을 미아삼거리..... 그곳에서 화석화된 과거를 캐내어 보고 답답함이라도 덜자는 심정으로 차를 몰아 미아리로 향했다.  




미아리는 생소했다. 유료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희미해 질대로 희미해진 기억에 기대어 이 골목 저 골목 걸어 다녀 보았으나 겨우 방향정도만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고 그 남자가 살았던 골목길들은 찾기 어려웠다. 길음동 산동네였던 그 곳에는 이미 대형 아파트 단지가 서있었고 주변의 길들이나 건물들도 새로 들어서서 어림잡아 유추 할 뿐 그 남자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희미한 잔상들과는 터무니없이 달랐다. 비는 계속 내리고 난감해 졌다. 그 남자의 유년시절은 이미 40년 정도가 지난 지금 복원하기 불가능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60년대 초반에 민둥산이었던 미아리는 판잣집이 하나 둘씩 무허가로 들어서고 지방 사람들이 서울 가면 뭔가 먹고 살길이 있을 것이라는 소위 서울-드림을 품고 무작정 상경하여 몰려들었던 곳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길을 먼저 내고 주택이 들어선 것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주택이 먼저 들어서고 그 사이를 길이라고 했기 때문에, 넓이도 다르고 방향도 엉망인 미로였다. 정부에서도 서민 대책이랍시고 대충 뒷돈 받고 인가를 내주었고, 박정희 정권 때부터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어 뜯어고치고 이제는 재개발 등으로 가차 없이 뭉개버리고 새집들을 지어내니 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는 그 남자의 추억을 찾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어 시간쯤 헤매고 나니 그 남자는 괜한 일을 시작했다 싶었다. 처음부터 무리한 계획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프려 했다.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곤 초등학교 시절 학교 다니 던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애를 썼다. 산비탈을 따라 미아삼거리로 내려가면 전차 길이 나있고 건널목을 둘 건너 학교로 갔던 비교적 분명한 기억들을 근거 삼아 이 골목을 다시 한 번 대비시켜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선 미아 삼거리 쪽으로 길이 세 군대로 갈라지는 중간 언덕쯤에 서서 장위동 방향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 보았다. 그 골목길은 매우 짧았다. 3분도 걷지 않아서 미아삼거리가 나와버린 것이다.
‘이렇게 가까울 리가 없을 텐데.....’
그 남자의 기억만으로는 이 길이 맞는 것 같았다. 길 건너 종암동 쪽으로 아버지가 보일러공으로 일하던 염직공장이 있었고, 동물원이 함께 있었던 창경원(지금의 창경궁) 소풍을 갈라치면 여기서 전차를 타고 미아리 고개를 넘어 혜화동을 지나갔었던 자리이고  또한 미아리 텍사스촌이라고 불렸던 창녀촌이 길 건너부터 골목을 따라 종암동 개천까지 이어져서 초등학생들이 가면 창녀들이 성기를 잘라먹는다는 끔찍한 경고를 수없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혹여 헤맸던 골목길들이 변형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남자가 서 있는 자리는 초등학교 시절 기억과 사뭇 일치하는 곳이었다.

그 남자는 다시 뒤로 돌아섰다. 오던 길을 천천히 걷기 위해서다.  처음 지점이 확실하다면 이 방향의 길은 분명 수백 번을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로 이용했던 곳일 것이다. 주변을 살피며 초등학생의 걸음걸이와 두리번거림을 따라하며 더 천천히 걸어 보았다. 방금 전에 출발했던 중간 언덕은 먼발치이기는 하지만 벌써 눈에 들어왔다. 이 길에서 단서를 찾지 못하면 어려워진다. 그 남자는 집중했다. 그리고 35년은 족히 넘은 초등학교 때의 하교 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옛날 여름 하교 길에는 어김없이 얼음과자를 파는 곳이 왼편으로 골목이 시작되는 길목에 있었다. 그 얼음과자는 형편없이 촌스러운 색소와 사카린으로 맛을 내고 작은 수류탄 모양의 양은용기에 넣고 막대를 꽂아 얼음과 소금을 넣은 둥근 통에 넣고 돌리다가 3-4분쯤 지나 꺼내면 둥근 모양의 얼음과자가 되었는데 값은 1원이었다. 그 만드는 과정이 하도 신기하고 먹고 싶은 마음에 언제나 하교 길이면 그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던 곳이다. 1원도 없어서 먹어보지 못하고 그저 침만 흘리고 서 있었던 그 곳...... 이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걸어가자 아까는 보지 못했던 왼편으로 정말 작은 골목길이 나 있었다. 또 몇 사람이서 있을 만한 장소도 그곳엔 있었다. 꼭 지금 금방 누군가가 마법으로 길을 만든 것처럼 옛날 기억과 일치하는 골목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보았다. 키가 커져서 130cm도 안된 어린 시절의 눈높이를 알아채지 못했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산을 들고 앉아서 사방을 보니 모든 것이 서 있었을 때보다 모두 크고 높아 보였다. 좁게만 보였던 얼음과자를 만들어 파는 그 곳도 넓게 보였음은 당연하다. 두 번째 점.... 처음 찾았던 미아삼거리와 지금 얼음과자를 만들어 파는 곳을 이으니 작은 선이 되었다. 복원된 그 남자 과거의 작은 선이 된 것이다.          


내쳐 중간 언덕으로 올라갔다. 2시간 전에 이곳을 몇 번을 지나쳤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지문인식기에 맞추어 정확히 일치되듯 기억이 점점 선명해져 옴을 느끼는 곳이 되었다. 3번째 점이 분명해지자 기억 복원의 능력도 빨라졌다. 여기서 왼 쪽으로 계속 가파르게 올라가면 가면 5살 때 서울로 올라와 살던 집과 초등학교 입학 후에 마당이 있는 집에 사글세로 살던 곳이 나오고 이 자리에서 앞으로 계속 내려갔다가 다시금 삼양동 방향으로 완만하게 올라가면 중학교 때 살던 집이요, 미아 시장 길로 나가 영훈 초등학교 길을 따라 올라가면 고등학교 때 살던 집이 나온다. 그 남자는 갑자기 과거가 살아나고 있음에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그 남자는 빠르게 왼쪽 언덕으로 나있는 골목길로 향했다. 40년 전에 살았던 집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올라가니 멀지 않은 곳에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그리고 산 쪽으로 나있는 조그마한 골목들도 끝나 버렸다. 집들도 모두 최근 몇 년 사이에 개보수들을 해서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그 남자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골목이 끝나는 곳까지 걸어 보았다. 5살 때부터 초등학교 시절의 집은 없어진 것이 분명했다. 아파트가 무자비하게 나의 추억을 말살해 버린 것이다. 주변의 환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축물 - 아파트 그렇게 어울리지 않게 저만 잘난 체를 하고 있었다.
‘ 저 좆같은 아파트 ! ’
그 남자 역시 지금 누군가의 추억을 뭉개버린 아파트에 살면서도 그만 욕이 나왔다.
그 남자는 목이 말랐다. 너무 허겁지겁 올라온 탓이다. 우산까지 들고 있으니 온몸이 안팎으로 젖어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슈퍼를 찾았다. 시원한 사이다를 마시고 싶었다. 골목길을 내려오며 오른쪽으로 휘어진 곳에 거의 쓰러질 듯한 가게 하나를 발견하였다. 속이 빈 벽돌을 쌓고 시멘트를 바른 벽이 얼마나 지났는지 검은 색이 돌았고 갖은 광고 쪽지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으며 지붕은 슬레트로 올렸는데 거의 삭다 시피해서 그냥 보기에도 오래된 집을 수리 없이 쓰며 가게를 하는 집이었다. 왼지 낯이 익은 이 집은 그러나 그 남자의 과거와는 연결시킬 수가 없었다. 그 남자는 우선 사이다를 꺼내 한 모금 크게 마신 후, 값을 지불하다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주인아주머니를 보고 물었다.

‘아주머니 이곳에 오래 사셨습니까?’
‘예?’
‘ 아! 예... 제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살았거든요. 그래서 와봤는데 잘 찾을 수가 없어서요. 한데 이 집은 오래된 집 같아서.......’
‘ 저의 친정어머니 때부터 살던 집이예요. 그러니까 50년은 족히 넘었어요. 계속 고쳐가며 살았지만 원래 모습은 그대로 남은 셈이죠’  
‘ 이곳에서 나서 지금껏 사신 겁니까? ’
‘예....’
‘제가 살던 곳은 여기 왼쪽 모퉁이를 돌아 삼양동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두 갈래로 갈리는 길에서 오른쪽 중간쯤에 살았습니다.’  
‘ 그 길들은 90년대 초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모두 없어졌어요. 물론 집들도 다 허물었고요 ’
‘ 여기서 계속 사셨다면 어려서 저와 한 동네에서 컸다는 것인데 이 가게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아주머니도 모르겠구요’
‘ 숭인 초등학교를 다니셨나요? ’
‘ 아 ! 예..... ’
‘호호! 여기 애들은 모두 숭인 초등학교로 배정되었죠. 하지만 저는 영훈 초등학교에 다녔어요. 당시에는 부잣집 애들만 다니던 곳이죠. 이 근방에서는 저희 집이 잘 살았으니까 부모님이 욕심을 내고 보내셨나 봐요. 요즘엔 이 모양으로 쪼글어들었지만요......’  
호탕한 성격의 아주머니는 묻지도 않았던 것까지 시원시원 말을 해주었다.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는 동질감 때문일 수도 있었겠지만 짧은 시간에 처음 만난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었다. 덕분에 그 남자는 질문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실례지만 아주머니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저는 58년 개띠 마흔 여섯입니다만......’  
‘ 호호! 별걸 다 물으시는군요 ......60년 생이에요’
‘ 혹시 어려서의 이 가게에 얽힌 기억들이 있으십니까? ’
‘ 음~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에는 큰 TV가 있었어요. 김일 레슬링 할 때면 저 밖에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보곤 했죠.
‘ 아~ 맞아요. 맞아요! 김일 레슬링! ....... 내가 레슬링을 본 곳이 이 곳이군요. 서부영화 <보난자>나 <황금박쥐> 만화도 봤었어요. 그 때는 굉장히 넓은 마당이 있었는데요. 나무도 있었고......’
‘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넓은 마당은 그대로 예요. 아이의 눈으로 보면 가게 앞마당이 커 보이겠죠. 나무도 있었었어요. 죽어서 베어 버리기는 했지만.....’  

그 남자는 생각이 났다. 벽장 속에 처박아 놓았던 흑백 사진들을 볼 때처럼 말이다. 60년대 후반 온 국민의 열망처럼 그리고 가난한 서민의 영웅이었던 프로 레슬러 김일이 게임을 할 때면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틀고 열광을 했었다. 이 가게에서 처음으로 흑백 TV를 구입하여 동네사람들에게 구경거리를 제공했으니 그런 날은 온 동네가 아침부터 술렁일 정도로 흥분했었다. 프로레슬러 세계 챔피언, 박치기 왕으로 불렸던 김일은 서민의 응어리를  드라마 같은 시합으로 풀어주었다. 초반에는 피 흘리며 터지다가 또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을 것 같은 벼랑에서 기사회생하여 1대1 동점을 만들고 다시 불같은 투혼으로 일본 선수, 미국 선수들을 마지막 박치기로 날려버려 승리하는 감동의 게임을 펼쳤다. 간혹 어른들은 짜고 이기는 것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했지만 김일은 분명한 영웅이었다. ‘김일은 언제나 이겨야한다 ’에서 ‘ 김일은 왜 언제나 이기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든 것은 그 남자가 중학교를 올라가서였다.



어린 시절 그 남자는 이 산동네에서 10년은 족히 살았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 동네 놈들에게 촌놈이라는 놀림을 당하며 또 말을 느리게 하는 충청도 사투리를 쓴다고 바보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서울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생일이 빨라 남들보다 1년 먼저 초등학교에 진학했고 언제나 남보다 늦었고 공부도 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까지 밤이면 오줌을 쌌고 제대로 씻지도 못해 손과 목에 때가 가실 날이 없었으며 발육도 늦었는지 맨 앞줄에 앉았다. 체육도 못했고 미술과 음악이 <수>나 <우>였고 다른 과목들은 <미>, <양>으로 60명쯤 되는 반에서 40-50등 사이였다. 즉 그 남자는 지진아에 속했다. 같은 반 학생들은 놀아주지 않았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지도 몰랐고 선생님은 관심도 없었다. 성적표를 받아오는 날에는 언제나 매를 맞았고, 매월 내는 월사금(요즘의 등록금)을 제때 내지 못해 담임선생님이 ‘ 등록금 안낸 놈들 일어나!’ 하면 당연히 일어나야 했으며 그 벌로 남아서 청소를 하고 유리창을 닦았다. 나중에는 반장한테도 화장실 뒤편에 끌려가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같은 나이의 초등학생들에게도 계급이 있었고 반장은 선생님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음으로 반장에게 터지면서도 ‘예, 예’그랬다. 학기마다 있는 가정 방문 때 그 남자 집은 대충 보고 다음 반장 집으로 직행하는 선생님의 약삭빠름도  그때 보았다. 반장 집에서는 고기를 대접하면서 돈도 준다는 사실을 알 정도였으니까. 책과 공책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고 크레파스는 쓰레기통이요, 연필은 성한 것이 없었고, 책가방은 누더기처럼 너덜거렸다.    

그래서 그 남자는 이곳에서 살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때가 많았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까지 가정환경조사서라는 것을  너무 솔직히 썼던 것도 철저히 후회하고 있다. 그 염라대왕 장부 같은 가정환경조사서는 비참함을 가중시키기만 할 뿐이었음에도 집은 전세 얼마, 자동차 없음, 전화 없음, 오디오 없음, 냉장고 없음, 은행예금 잔고 없음, 현금보유 없음, 단칸방에서 4식구가 삶, 아버지 직업 보일러공........ 학교에서 확인 할 길도 없고 확인한다하더라도 별반 큰일도 나지도 않을 일들을 겁을 잔뜩 먹은 채 정확히. 아주 정확히 빈곤과 무식을 고자질했다.


그 남자는 담배를 갈아가며 피워 물었다. 축축한 습기를 따라 폐 속 깊은 곳에서부터 연기를 내 뿜었다. 과거를 씻어내기라도 하듯이 또 빨고 또 빨아댔다. 서너 개의 꽁초들을 비 오는 골목에 휙 던져버리고 나서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 남자는 이 골목들을 익숙하게 알 것 같았다.  기억도 상당부분 입체적 복원이 된 느낌이 들었다. 하나의 길은 양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이로되 길에 대한 기억은 한 방향에 더 많이 저장되어 있음도 알았다. 그래서 아무리 산동네에 무계획적으로 엉켜진  좁은 골목길이라 하더라도 슬픈 추억이라도 있으면 길은 찾을 수 있었다. 그 남자는 내리막길로 내려가 미아 시장가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이 길들은 아까 어디인지 몰라 헤매던 곳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어머니와 시장을 가던 그 길이 분명히 보였다.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옛날 축대와 계단들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어느 집들은 초등학교 때 보았던 그대로 방치 되어있는 듯했다. 좁은 골목들은 아직도 그대로요, 담에 누군가 그어놓고 간 백묵자국들, ‘ 누구 개새끼’ ‘누구랑 누구랑 씹했다’, 그리고 다리 벌린 여자의 그림들이 있었다. 세월이 흐르긴 했어도 아직도 그대로인 사람들의 습관이다.  화장실이 대문 옆에 붙은 집들이 덕지덕지 이어져있고 알량한 벽들 위에 깨진 병 조각을 심어놓은 좁은 골목길들은 언뜻 보면 막힌 길 같지만 막상 가보면 샛길이 나있는 곳을 지나 미아시장 입구까지 걸어갔다. 그 남자는 다시 이 길을 천천히 거꾸로 걸어갔다. 이 길에는 세 가지 추억이 그 남자에게는 있다. 하나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요, 장위동 벌판에 대한 추억이요, 하나는 신문배달에 대한 추억이다.


그 남자의 어머니는 배우지 못했지만 음식 솜씨는 좋은 분이었고 괄괄하며 거칠고 사람들에게는 낙천적이며 생활력이 강했다. 허깨비 같이 겉만 멀쩡하고 생활력이 없는 남편을 만나 죽을 때까지 행복했던 적은 별로 없었다고 말 할 정도였다. 남보다 욕심도 많고 신경질이 많아서 자주 남편과 싸웠다. 그 남자가 초등학교 때 어머니와 미아시장을 자주 다녔는데 때 묻은 월남치마를 잡고 시장에 따라가면 언제나 그 순대 좌판 앞에서 떼를 썼다. 실패하면 길바닥에서 개처럼 맞는 환란을 당해야 함에도 순대에 대한 집념은 강했다. 순대를 못 먹는 날이면 집에 올 때까지 그 분을 삭이지 못하다가 기어이 길바닥에서 매를 맞고서야 집에 왔던 기억이 더 많다. 철저히 매로 먹는 것에 대한 욕망을 버린 것이다. 그러니 이 좁은 골목길들은 그 남자의 고집과 어머니의 고집이 날카롭게 대립했던 그리고 일방적으로 때리게 함으로서 어머니의 마음을 들 쑤셔 놓았던 길이다. 그것은 일종의 복수였다. 길바닥에 앉아 ‘아이고 내 팔자야!’를 연신 되뇌며 우셨던 어머니를 보고서야 빌고 또 빌었다.

또 한 가지는 벌판에 관한 추억이다. 학교에 재미를 못 붙인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학교에 다녀오기가 무섭게 책가방을 팽개치고 이 길을 지나 장위동 쪽의 들판으로 달려가 개구리 잡아 패대기를 한번 친 다음 다리를 쭉 찢어 구어 먹고, 개미 똥구멍 빨아먹고, 잠자리 대가리만 다 떼어 내어 씹어 먹었다. 가을이면 논에 나가 메뚜기를 잡아 들판에 불을 질러 구어 먹고, 논두렁에 심은 콩을 훑어 불 질러 알맹이만 빼먹곤 했다. 동네 배짱이 든든한 놈들하고는 감자를 서리해서 땅을 파고 장작을 태우다가 서리한 감자를 불에 넣고 흙을 덮은 다음 한 시간쯤 전쟁놀이를 하고 나서 감자를 파내어 껍질을 벗겨 처녀 속살 같이 예쁜 감자를 먹었다. 아직 남은 불씨들은 둘러서서 오줌을 갈겼다. 그 극심한 지린내..... 입가와 손에는 숫검둥이 묻어 지워지지도 않고 옷은 황토 흙으로 범벅을 해 가지고 어둠이 내린 이 골목에서 마지막 점검을 한답시고 옷을 털고 입을 닦고 하면서 불안해했다. ‘무어라 거짓말을 하지? 저녁은 왜 안 먹는다고 하지? ’ 갖은 머리를 굴리다가 집에 들어오면 남는 것은 어머니의 매 뿐이었다. 한바탕 매를 맞고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신문배달은 1969년 초등학교  5학년말부터 6학년 초까지 8개월 정도 했다. 동아일보였는데 일반신문 100부와 소년동아일보 20부 정도를 배달하면 한 달에 600원 정도를 받을 수 있었다.   대지극장 옆 신문보급소에서 신문을 추리고 삼양동 산동네를 휘저으며 배달을 끝내면 어둑어둑해졌다. 집에 와서 밥 먹으면 그대로 곯아떨어지기 마련인데 하루의 체력을 신문배달로 다 써 버렸으니 학교에서 그 잘난 공부실력을 늘릴 수가 없었다.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오는 날이나 명절 때에도 신문은 돌려야 했고 신문대금 수금도 배달부가 직접 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5학년으로서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집 가까이 배달 지역도 있기는 했지만 아는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죽기보다도 싫은 일인지라 멀더라도 삼양동을 택했다. 신문을 다 돌리고 나면 이 골목을 통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피곤한 걸음걸이가 배어있었던 골목길……. 밤길에 골목길을 뛰어 길음동 산동네로 향하던 길들이다.  

너무도 쉽게 찾은 골목길들을 돌면서 그 남자는 벽들을 만져도 보고 정성스럽게 밟아도 보았다. 그것은 일종의 화해 예식과도 같았다. 그 옛날의 삶을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옛날 찍혔을 발자국과 땀방울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완전히 어두워졌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살던 집은 아파트로 인해 없어졌으니 그 남자의 마지막 골목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가기 전까지 2년 반 동안 살았던 골목과 집을 찾아가 보는 일이었다.  이제는 밤이라 하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낮에 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조금 더 생생하게 보고 싶었던 욕심 때문이었다.


며칠 뒤 그 남자는 일요일 오후를 택해서 다시 미아리 삼거리를 찾아갔다. 역시 그 날도 비가 내렸다. 찾으려 했던 집은 아주 쉽게 찾았다. 더구나 배려라도 하듯 하나도 변한 것 없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2층 다세대 주택으로 1층과 2층 계단 사이에 8가구가 공동으로 쓰는 화장실이 하나 있고 긴 복도를 끼고 4칸씩 방들이 배치되어 있는 건물이었다. 각 방은 들어가자마자 부엌이 있고 큰방과 작은 방이 문 하나로 이어진 겉은 그럭저럭 근사하게 보여도 속은 교도소와도 같은 그런 집이었다.  그 남자는 ‘ 나는 이곳에 산 적이 없어요!’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 남자는 당시 이곳에서 죽음을 생각했다. 2층 방에서 할 일은 죽음밖에는 없을 정도로 삶의 벼랑에 있었다. 대학합격에도 불구하고 입학금 때문에 ‘생명의 땅’이라고 굳게 믿었던  대학문턱에서 좌절했고, 직장생활을 하며 대학 진학을 위해 재수와 삼수를 했다. 구질구질한 삶을 사느니 깨끗이 끝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야속한 부모님에 대해, 친척들과 친구들에 대해, 출신 고등학교와 대학과 이 사회에 대해 단 한 순간만이라도 복수를 할 수 있는 길은 죽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자살을 할 만큼 모질지 못했다. 무섭고 두려웠으며 억울하기도 하였다.

그 남자가 부모 원망을 가장 많이 한 때도 그 때였고 친척들과 등을 돌린 때도 그 때이다.  술을 마시면 죽을 때까지 마셨다. 친구들이 대학을 다니며 미팅이 어쩌고, 학점이 어쩌고, 계절학기가 어쩌고 할 때면 생명의 나라에 동참하지 못해 그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죄인의 참담함으로 또 마셨다. 2년 뒤 겨우 하고 싶은 음악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헝클어진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그 남자는 많이 망가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 8월에 현역입대 영장이 나왔다. ‘ 신체등급 갑, 현역입영대상, 병과 일빵빵 보병 소총수, 입대일 8월20일 조치원 훈련소........’  하는 일 마다 안 되는 머피의 법칙에 걸리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풀려고 할수록 더 엉켜 들어가는 불운의 연속이 2년 반 동안 이 골목 2층집에 살면서 겪어야 했던 일들이다.

그 남자는 창자부터 썩어 들어가는 답답함을 안고 이 집에서 살았다. 겨울에도 찬물로 목욕을 했다. 가슴부터 치밀어 오는 말 못할 분노는 찬물을 들이부어도 식지 않았다.        

그 남자는 한동안 2층집 계단에 앉아 있었다. 다행이 오고가는 사람들도 없었으며 방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계단을 올라 살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남자는 한번보고 싶었다. 그 방을 한번보고 싶었다. 죽었으면 싶었던 스무 살의 방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낯익은 복도가 나타나고 비가 왔음에도 창문 쪽에서 빛이 들어 어두운 복도를 띄엄띄엄 갈라놓는 복도를 천천히 들어갔다. 두 집은 자물통이 굳게 채워져 있었다. 그 남자는 복도 끝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어 보았다. 닫혀있었다. 망설임 없이 두드렸다. ‘ 어머니 나왔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난 하구나 이 집은.......’할 정도의 궁색한 부엌이 나온다, 신발을 벗고 오른 쪽으로 두 계단 올라가 문을 열면 어둡고 좁은 안방이 나오고 싸구려 장롱과 너저분한 화장대가 보인다. 그리고 다시 쪽문을 열면 창문이 하나 보이고 왼쪽으로 허름한 책상과 아직도 대학 입시용 책들이 널브러져 있고 덩그러니 놓인 기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슬픔에 찌든 놈이 있을 것이다. 그놈은 아직도 울고 있을 것이다. 인생이 억울해서 울고 있을 것이다.
그 남자는 과거의 자신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 예야! 너는 불행하지 않다.
죽을 생각일랑 아이에 잊으려무나.
지금의 슬픔으로 흘리는 눈물과 안타까움과 분노와 억울함이 네 인생의 자양분이 된단다.
그 고통들이 너를 인내하는 사람이 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가슴 깊이 이해하고 도우려는 착한 마음으로 변한단다. 그러니 울지 말아라. 그러니 죽지 말아라. 너의 앞으로의 인생은 네가 원하는 것 보다 더 많이 이룰 정도로 그리 나쁘지 않단다. 예야.......

갑자기 빗방울이 굵어졌다. 세차게 우산을 때리기 시작한다. 바지와 등까지 젖어들어 왔다. 좁은 골목길의 더러움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물줄기들이 낮은 곳으로 바쁘게 흐르고 있었다. 누가 버린 담배꽁초, 휴지, 껌 종이들이 쓸려 내려가고 있었다.
  

홍준철 / 1958년 대전에서 태어나 서울 숭인 초등학교, 염광 중학교, 세종 고등학교를 거쳐 세종대학교, 동 대학원에서 음악을 전공했다. 필리핀 AILM의 International conducting workshop에 3년 동안 참가하여 지휘를 익혔다. 신흥대, 간호대, 송파구립합창단을 지휘하였으며 현재는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의 상임지휘자로 활약하면서 창작합창음악 보급에 힘쓰고 있다. 성공회대학 대우교수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공통교과부에 출강하며 파주북소리합창단, 광진구립여성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


  김지형 진짜 선생님이 쓰신 글이에요?
대단합니다.. 역시 예술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군요.ㅠ.ㅠ
    2013/11/28
  최경은 홍샘은 작가하셔야해요~~정말 흡입력있는 글이에요 읽고 또 감동받았습니다~~     2013/11/28
  김미옥 지휘자님의 필력에 감탄~저도 비슷한 시기의 그 때 그 과거를 추억하게 해주셨네요~다음 글을 기대해도 되겠지요~^     2013/11/28
  김흔식 가을 男子의 진한 외로움(晩秋男의 純孤獨)이 물씬 뭍어 나는 短篇 小說 같은 先生님의 묵직한 實話 自畵像 이로군요...!
可能하시다면 아득한 한밭大田 龍頭洞용두동에서의 영유아時節 얘기까지 追加 補完 揷入하시어서 來年度의 新春文藝를 通하여 登壇하셔도 참 좋은 結果를 豫想할 수 있는 잘 다듬어진 旣存의 作家 作品처럼 敢히 느껴지니이다. 마치 우리들의 옛얘기를 꼭히 代辯하시는 듯한 文體와 느낌이 아련한 時節의 同感을 자아내 듯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참 아름다운 우리듣 世上이네요!
~ ~ ~ 老兒 큰 성의 拙考
    2013/12/02
  기자단공식 어마마마 저는 이제야 글을 읽었습니다요...^^ 멋진 홍준철 선생님 ~     2014/11/11
   새해에는 [3]  홍준철
   늦는 관객  홍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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